청춘예찬, 그 글이 기억났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우보(牛步) 민태원(1894~1934) 선생의 수필 '청춘예찬'이 문득 생각나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교과서 외에 참고서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 새 학기만 되면 참고서를 사기 위해 어머니께 돈을 얻어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에 가곤 했다. 젊은 시절 바쁘게 사느라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아련한 기억들이, 이제야 하나둘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돌이켜보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조급한 시기였다. 당시의 나는 막연하게도 '서른다섯 살만 되면 내가 꿈꾸던 미래가 다 이루어지고, 삶의 이치를 깨달은 현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서른다섯을 인생의 가장 완벽한 황금기라 여기며 살았기에, 내게 '청춘'이란 유년에서 어른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저 한 계단쯤 훌쩍 건너뛰어도 좋은 징검다리 단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랬기에 우보 민태원 선생이 그토록 뜨겁게 예찬했던 청춘의 찬란한 산문은 당시 내 눈에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국어 선생님의 열정적인 수업조차 그저 '화려체', '만연체' 같은 문체 용어로 기억될 뿐이었고, 나는 그것을 그저 국어 시험의 예상 문제로만 여기며 기계적으로 노트에 받아 적었을 뿐이었다.
그 시절을 지나 눈앞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 나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할머니들의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만큼 분주했다. 어찌 늘 성령충만의 기쁜 날만 연속된 삶이었으랴마는, 그저 남들처럼 치열하게 부딪치며 참 열심히도 살았다. 게다가 이민 1세로서 삶의 터전을 다지는 과정은 정말 숨 가쁘고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는 인생의 단계에 접어들어서일까. 여행지에서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으려고 가방 구석구석 우겨넣었던 기념품들을 이제야 하나씩 꺼내어 보며, 지난 기착지에서 머물렀던 시간을 아련하게 회상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쩌면 가방 속에 넣어두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해묵은 물건을 뜻밖에 꺼내 든 느낌으로, 다시금 '청춘예찬'을 정독해 보았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이 글을 쓴 당시 우보 민태원 선생의 나이가 바로 서른다섯 살이었다는 것을. 그 서른다섯의 시선에서 바라본 청춘이 이토록 화려하고 찬란하게 묘사되었다는 사실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문득 부질없는 궁금증이 고개를 든다. 만약 내가 서른다섯이 되기 전, 아니 훨씬 전인 열여덟 어린 시절에 이 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더라면, 내 안에 숨겨진 더 많은 가능성을 이끌어내며 조금 더 멋지게 인생을 개척했을까? 아니면 그때 역시 철이 덜 든, 그저 방황하는 또 하나의 청춘이었을까.
혹시라도 나와 같이 우보 민태원 선생의 수필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이분의 화려하고 뜨거운 글을 아래에 옮겨본다. 아시다시피 이 글은 1929년 잡지 《별건곤》에 수록된 수필로, 저작권 시효가 소멸되어 누구나 제약 없이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우보 민태원 선생님의 소중한 유산이다.
청춘예찬 (靑春禮讚) 민태원 (閔泰瑗) (1894~1934)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靑春)!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心臟)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靑春)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歷史)를 꾸며 내려온 동력(動力)은 꼭 이것이다.
이성(理性)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知慧)는 날카로우나 갑(匣)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生命)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이다.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이다.
보이는 끝끝까지 찾아다녀도,
목숨이 있는 때까지 방황(彷徨)하여도,
보이는 것은 모래뿐인 것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 남는 것은
영락(零落)과 부패(腐敗)뿐이다.
낙원을 장식하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이 어디 있으며,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과실이 어디 있으랴?
이상(理想)!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으므로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釋迦)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광야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孔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轍環)하였는가?
밥을 위하여서,
옷을 위하여서,
미인을 구하기 위하여서
그리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커다란 이상,
곧 만천하(滿天下)의 대중(大衆)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밝은 길을 찾아주며,
그들을 행복(幸福)스럽고 평화(平和)스러운 곳으로 인도(引導)하겠다는
커다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지 아니한 목숨을
사는가 싶이 살았으며,
그들의 그림자는
천고(千古)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현저하여 일월(日月)과 같은 예가 되려니와
그와 같지 못하다 할지라도
창공(蒼空)에 반짝이는 뭇별과 같이,
산야(山野)에 피어나는 군영(群英)과 같이
이상(理想)은
실로 인간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라 할지니,
인생에 가치를 주는 원질(原質)이 되는 것이다.
이상!
빛나는 귀중한 이상,
그것은 청춘이 누리는 바 특권이다.
그들은 순진한지라 감동(感動)하기 쉽고
그들은 점염(點染)이 적은지라 죄악에 병들지 아니하였고,
그들은 앞이 긴지라 착목(着目)하는 곳이 원대하고,
그들은 피가 더운지라
현실에 대한 자신(自信)과 용기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의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 인생을 풍부(豊富)하게 하는 것이다.
보라, 청춘을!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는 생의 찬미(讚美)를 듣는다.
그것은 웅대(雄大)한 관현악(管絃樂)이며,
미묘(微妙)한 교향악(交響樂)이다.
뼈 끝에 스며들어가는 열락(悅樂)의 소리다.
이것은
피어나기 전인 유소년(幼少年)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시들어 가는 노년(老年)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오직 우리 청춘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黃金時代)다.
우리는
이 황금시대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發揮)하기 위하여,
이 황금시대를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하여,
힘차게 노래하며 힘차게 약동(躍動)하자!
〈별건곤(別乾坤)〉 21호 1929.6
내 영혼이 찾아가는 카페
오랜 세월 카페를 운영하며 얻은 나름의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이 카페를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카페인의 힘을 빌려 집중력을 높이려는 기능적인 이유가 대부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기분 전환의 공간이자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많고 많은 카페 중에 유독 어느 한 곳을 고집하며 찾는 이유는 비단 커피 맛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 머무는 것 자체로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커피 맛만큼이나 '분위기'라는 단어가 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수많은 카페 운영자들이 이러한 고객의 니즈를 반영해 인테리어를 특색 있게 꾸미거나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려 애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나는 이곳에 새로운 카페를 열고, 전과는 다른 상품을 진열해보려 한다. '글로 만드는 카페'를 열어두고, 그윽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려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 발걸음하는 이들이 낯설고 새로운 공간 속에서도 더없는 편안함을 느끼며, 영적인 쉼을 얻고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이 초라한 글이 이루고자 하는 전부이자 목적이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그 허물을 벗으며
게으른 완벽주의자, 그 허물을 벗으며
은퇴를 준비하던 몇 달 전부터 줄곧 생각했던 일이 있다.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열어 믿음의 글을 쓰고 남기는 것. 혹시라도 누군가 '아가페 케어'에 발걸음을 하게 된다면, 그들의 영혼을 위한 작은 카페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저 머릿속에만 맴돌 뿐이었다. 글 한 줄 적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마땅히 표현할 길 없는 처참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다 우연히 읽은 기사 한 편에서 지금 나의 상태를 규정하는 단어를 만났다. 바로 ‘게으른 완벽주의자’였다. 기사 속 많은 구절이 내 마음과 행동 상태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너무 완벽하게 해내려고 거창한 전체 계획을 세우는 데만 시간을 쓰기보다, 작은 세부 계획부터 세우고 일단 실천하는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혹시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완벽주의'라는 핑계로 게으른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격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한 가지는, '새로운 일을 불편해한다'는 사실이었다. 편안하고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새롭고 낯선 환경을 본능적으로 불편해한다는 점이었다.
참으로 그러했다. 나는 지금껏 완벽한 웹사이트를 만든다는 핑계로 구상만 거듭하고 있었고, 타인과의 온라인 소통을 내심 불안해했다. 무엇보다 편안하고 익숙한 것에 안주하며 새로운 환경을 밀어내던 나를,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콕 집어내어 글을 써 내려간 듯했다.
사실 이 글도 아주 오래전에 시작했으나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에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수려한 문맥으로 시작하지도 못했고 완벽한 결론을 맺지도 못했지만, 오늘은 기필코 마치리라 다짐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또 미루다가는 10년 후에도 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채, 무력감과 좌절감 속에서 답답해하고 있을 테니까.
나는 이제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 아닌,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을 시작하려 한다. 두려운 마음도 잠시 내려놓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으며 이 첫걸음을 떼어 본다.
나… 정말 잘해낼 수 있을까?
네, 잘할 수 있습니다. 제 걸음은 비록 느리고 어휘는 투박할지라도, 선한 마음으로 내딛는 이 길을 그분이 온전히 인도해 주실 테니까요.